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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 러 리admin2023-12-06T10:34:44+00:00

케임브리지 한인교회 갤러리

Cambridge Korean Church in UK

camkorchurch

Cambridge Korean Church in United Kingdom | 케임브리지 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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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제자훈련 / 월요모임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시편 1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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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월)부터 19일(토)까지 
홍순조 목사님과 이현미 사모님 고국 방문 계획이 있습니다. 
방문 중에 12일(토) ’옛가족 모임‘을 오랫만에 가지고자 합니다. 
그리운 케임브리지 한인교회 옛가족들과 반가운 교제의 모임과 
은혜의 나눔의 시간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 바랍니다
_20250319 본문 : 출애굽기 1-2장 제목 : _20250319

본문 : 출애굽기 1-2장 
제목 : 히브리 산파들의 용기있는 행동과 믿음 

1. 애굽왕의 끔찍한 명령과 히브리 산파들의 거짓말
출애굽기 1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점점 강성해져서 애굽 사람들보다 더 많아지자 바로왕은 위협을 느낀 나머지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산파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16절) 고대 애굽의 절대권력자였던 바로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했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명령을 어기고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은 옳지 않고 ‘죄’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었기에 부당한 명령을 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는 남자아이들을 살린 그들을 불러 추궁하자 산파들은 ‘히브리 여인들이 애굽 여인과 같지 않게 건장하여 산파가 도착하기도 전에 해산한다’고 거짓말로 보고합니다. 

2. 히브리 산파들의 믿음과 하나님의 축복
산파들이 이렇게 용기 있는 결단으로 행동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가 더 크다고 믿었기에 사람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산파들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17,21절)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도 정탐꾼들을 숨기기 위해 비록 거짓말을 하였지만 하나님이 그녀의 집안을 구원하신 것처럼, 히브리 산파들의 믿음을 지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경외함으로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고 어려운 신앙적 결단을 하는 자들을 책임져 주실 것이고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3. 세상앞에 서 있는 신자들의 믿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죄와 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신자들이 살아갈 때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처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세속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갈때 큰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회와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관과 타협하며 번영과 성공을 위해 신앙도 잃어 버리는 오늘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세상을 거슬러 그의 말씀을 따르는 용기있는 행동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 !!! 바로의 명령을 거부한 히브리 산파처럼, 전도를 금하라고 명령한 공회원들의 위협을 거부한 베드로처럼,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을 거스르는 신앙적 용기를 주시옵소서. 때때로 이러한 결단이 고독하고 외로워 보이지만, 또 손해도 있겠지만 결국 우리를 책임지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_20250318

본문 : 마태복음 26-28장 (4주/2일차)
제목 :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교회 되게 해 주세요

1. 예수님의 명령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리워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인데’예수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라고도 합니다. 이 명령에는 네가지가 포함되는데, 첫째로, 가라(Go)입니다. 복음은 한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교회 밖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 주변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둘째로, 제자 삼으라(Make Disciples)입니다. 가서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또 다른 제자를 세우는 일입니다. 셋째로, 세례를 베풀라(Baptize)입니다. 공개적으로 신앙을 당당히 고백하는 신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가르쳐 지키게 하라(Teach & Obey) 입니다. 말씀의 단순한 지식전달이 아니라 배운 것을 삶 속에 실천케 하라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약속
예수님은 ”제자 만들라“고 명령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명령에 순종하여 나가는 자들에게 두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째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권세자가 우리의 가서 제자삼는 일에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명령을 부여잡고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 나아가는 이들에게 놀라운 열매들을 주셨고 그들의 가르침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을 주셨습니다. 둘째로, ’세상 끝날까지 동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제자삼는 일은 매우 고되고 힘든 일이겠지만 그 모든 일에 끝까지 곁에서 동행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오해도 받고, 반대와 저항도 있고, 마음 상하는 일, 낙심하여 포기하고 싶은 때도 있겠지만 모든 순간순간 함께 하시고 영원까지 동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사명 
우리 교회의 목표와 사명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기적과 문제 해결만 바라는 군중이 아니라, 교훈과 가르침에만 관심을 갖고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헌신하고 순종하며 주님의 ’제자‘를 삼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제자의 길이 장미빛 꽃길이 아니고, 순탄하고 쾌적한 여행길이 아니고, 모두에게 존경받고 대접받는 존중의 길이 아니고, 멸시 천대 박해가 있는 골고다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앞서 주님이 가신 길이기에 결심하고 묵묵히 길을 걷는 제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주님 !!!!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는 주의 명령을 순종하여 실천합니다. 우리교회를 찾는 모든 사람들이 주의 진실한 제자가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뿐만 아니라 이땅 영국에도 우리 주변의 모든민족도 주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도록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교회가 되게 해 주세요“
_20250317 본문 : 마태복음 24-25장 제목 : _20250317
본문 : 마태복음 24-25장 
제목 : 열 처녀 비유가 주는 메시지 

1. 비유에 대한 관찰 
열처녀 비유는 천국비유로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주신 중요한 교훈입니다. 이 비유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가지 비유, 즉 ’열처녀‘,’달란트‘,’양과 염소‘의 비유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고 각각의 비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 열처녀의 비유가 가르치는 핵심 교휸이 무엇일까요? 이 비유는 당시 유대인의 결혼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데 당시 결혼풍습을 통해 배워야 하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등과 기름이 내포하고 있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슬기로운 다섯처녀가 기름을 나눠 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고 그것을 통해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2. 비유에 대한 연구와 묵상 
열처녀 비유 관찰을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에 신자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준비하지 않은자들에게 기회는 영원하지 않고 문이 닫힌 후의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유대인들은 약혼(키두쉰)을 한 후 신랑이 집을 구하러 떠납니다. 그리고 나중에 신부를 데리러 올 때가 있는데 이때가 언제인지 정확한 날과 시간은 신부에게 미리 알려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시며 다시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알수 없기에 신자들은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셋째로, 다섯처녀가 기름을 나눠줄 수 없듯이 신앙은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형식(등, 교회출석, 신앙고백)만 가지고 있어선 안되고 내용(기름,성령, 열매 있는 삶)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3. 비유에 대한 적용 
예수님의 재림은 예고 없이 찾아 올 것인데, 나는 깨어서 그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람인가요? 예수님 기다린다고 말하고,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며 교회 생활하고 있지만 내 속에 성령의 기름을 채우며 에수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인가요? 나는 어리석은 다섯처녀들처럼 지금 내 영혼을 성령의 은혜로 채울 기회가 주어졌지만 신앙의 결단들을 뒤로 미루고 있지는 않나요?  나는 겉은 깨어 있지만 내면은 영적인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아닌가요? ”주님 !!! 천국은 준비된 자의 것임을 알게 아시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해 주세요. 매주 드리는 예배 때 성령의 기름으로, 은혜의 눈물로, 신앙의 결단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 주세요. 매일의 삶의 묵상과 기도로 기름을 준비하며 소망 가운데 주를 기다리게 해 주세요. 약속대로 때가 되었을 때 다시오실 주님을 항상 기다립니다“
_20250314 본문 : 마태복음 12-15장 제목 : _20250314
본문 : 마태복음 12-15장 
제목 : 우리는 가족인가? 친목 단체인가? 

1. 육신의 가족 
가족만큼 소중한 것이 있을까요?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단어요 가장 결속력이 있는 아름다운 개념입니다. 가족은 때로는 가까이 있어서 그 소중함을 잊기도 하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버팀목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주고,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며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가족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사역을 하실 때 가족이 찾아왔고 제자들이 이를 알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너희들이 내 형제요 자매 아니냐?“ 

2. 영적인 가족 
예수님은 가족을 배척하거나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말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들은 성령안에서 새롭게 거듭나고 출생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함께 거듭난 자녀들로 형제요, 자매라 여기는 새로운 영적인 가족 공동체인 것입니다. 육신의 가족은 혈연을 기반으로 하지만, 영적인 가족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성령안에서 연합된 더욱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영원한 가족인 것입니다. 단순한 친목 동호회나 가치를 공유하는 클럽이 아닌 영적인 깊은 아픔과 기쁨을 나누고, 서로의 은밀한 기도제목들을 나눌 수 있는, 힘든 순간에도 함께 기도하고 격려하는, 신뢰와 사랑의 가족 공동체인 것입니다. 

3. 혈육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가족
초대교회는 혈육보다 영적으로 가족된 지체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였습니다. 날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떡을 떼며 동고동락하는 그야말로 ’식구‘였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이러한 중요한 가족공동체 개념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말로만 형제요, 자매라 부르지만 서로를 모르고, 남이라 생각하고 적절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합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가 대형화 되면서 유대감을 잃어버리기도 했고, 초대교회의 영성을 잃어버렸기에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부족하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이 어쩔수 없다고 하여 우리가 소중한 영적인 가족의 가치를 잃어버려선 안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 것‘처럼 (히2:11) 우리교회는 신뢰와 사랑가운데 더 깊은 가족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 우리에게 소중한 형제 자매 가족공동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 모양과 생각, 배경과 캐릭터가 다르지만 한 가족이 되었사오니 신뢰하고 사랑하며 함께 기도하고 격려하는,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교회가 되게 해 주세요“
_20250313 본문 : 마태복음 8-11장 제목 : _20250313
본문 : 마태복음 8-11장 
제목 :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1. 평안하기를 빌라 
유대인들의 인삿말 ”샬롬“과 무슬림들의 ”아살람 알라이쿰“은 같은 뜻으로 ”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인삿말은 예수님이 열두제자를 마을과 성읍에 파송하면서 가르치신 복음전도 방법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가는 곳의 만나는 사람마다 평안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평안‘은 문제없는 안락한 삶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오는 참된 평안을 말합니다. 복음이 없는 죄된 인생들에게는 참 평안이 없고 불안과 불행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정적인 말, 낙심케 하는 말, 불안케 하는 말이 아닌 평안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도 서로의 평안을 빌며 기도하는 따뜻한 격려의 공동체, 그리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전하는 전도의 공동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2.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그런데 예수님은 평안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며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너희를 영접하지도 않고 너희의 말을 듣지도 않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14절) 우리 생각 같어선 그런 사람들을 왼편의 뺨도 돌려대며 사랑으로 품고 용납하며 기다리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단호히 거부하는 사람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고 억지로 매달리지 말고 미련을 버리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마음이 더 열려 있는 곳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했다면 주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우리가 구원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실하게 전했다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3.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영적인 전투‘입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강하게 거절하고 방해하는 사람이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복음전하는 사람들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뱀처럼 주변의 소리에 민감해야 하고, 공격하면 방어하고, 기민하게 피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또 복음이 훼손되지 않도록 순결하고 정직한 인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을 파송하는 예수님 역시 지혜롭고 순결하셨습니다. 그를 찾는 자들에게는 평안의 복음을 전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의 거친 공격과 저항에서 떠나며 자신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안의 말이 아닌 평안의 복음을 전하게 해 주세요. 거절하고 방해 하는 사람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게 해 주세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혜롭고 순결한 삶을 살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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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 5-7장 
제목 : 하늘에 내 보물창고가 있을까? 

1. 보물을 땅에 쌓아 둔다는 것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보물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보물‘은 돈, 학벌, 직장, 승진,자녀,건강 등이 될 수 있습니다. ’땅에 쌓는다‘는 것은 이것들에 가장 가치를 두고 마음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21절)고 하셨습니다. 즉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것이 나의 마음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인데 하나님 보다 위의 것들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시간을 투자하고, 없으면 불안해 하는 이러한 상태를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보물을 땅에 쌓지 말라고 하실까요?’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녹, 도적이 있어서 한순간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 권력, 명예, 인기, 건강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기에 이런것들에만 마음을 두지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2.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둔다는 것 
그렇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님이 오른편의 의로운 사람들을 맞으며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복 받는 자들이여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너희들은 내가 헐벗을 때 옷을 주었고, 굶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다‘ 이때 의인들이 반응합니다. ’주여!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잘 생각이 안나는데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 중에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34-40절) 즉, 보물을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 형제들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나만을 위해 살지 않고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사랑과 나눔이 있고, 복음을 전파하는 영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차곡차곡 하늘에 쌓아두고 계실 것이고 이 보물은 하늘에서 없어지지도 않을 것이며, 훗날 반드시 더 큰 은혜의 보상으로 주실 것이기에 우리보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나는 보물을 어디에 쌓고 사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나는 지금 보물을 어디에 쌓아두고 있는 사람일까요? 나의 상태를 어떻게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요? 그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지 무엇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점검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보물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24절) 나는 지금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내가 정말 중히 여기고 경히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 그동안 나의 보물은 땅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없어지고 사라질 것에 너무 마음을 두며 집착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 믿고 신기루 쫓는 것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들을 잃지 않아야 할텐데 불안해 하며 살았습니다. 주님! 이제 영원한 가치에 마음을 두고 더욱 성실하게 주신 삶에 책임있게 최선을 다해 살게 해 주세요. 영원한 가치에 소망을 두고 주변의 사람들을 친절히 여기고 사랑과 나눔의 삶을 살게 해 주세요“
_20250311
▪️본문 : 마태복음 1-4장 
▪️제목 : 예수님의 계보에 나타난 놀라운 복음 메시지

1.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계보로 시작됩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 부분은 크게 고려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계보는 강렬한 복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메시지는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창12:3)와 다윗에게 한 약속 “네 왕위가 영원하게 될 것이다”(삼하7:16)을 정확하게 이루신 것을 계보를 통해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은 수천년을 기다리시다가 약속대로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약속에 성실하신 주님은 그 아들을 마지막날 다시 보내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죄인들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계보는 소위 거룩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하고 깨끗한 혈통의 계보를 보여주고 있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계보에는 포함되기 부끄럽게 생각되는 죄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를들어, 속임수에 능했지만 은혜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던 야곱, 동생을 팔아 넘겼을 뿐 아니라 며느리 다말과 불의한 행동을 한 유다,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 우상숭배로 타락한 솔로몬, 남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왕 중의 한명이었던 우상숭배자 므낫세 등 많은 죄인들이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계보에 이러한 인물들을 넣은 이유는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죄인일지라도 은혜 안에서 새롭게 변화 될 수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의 계보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은 계보안에 유대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 인류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보여 줍니다. 계보안에 있는 다말은 가나안 여인으로 유다의 며느리였고, 라합 역시 가나안 사람으로 여리고성의 기생이었으며, 룻은 모압 여인으로 시어머니를 따라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계보에 이방인들을 포함시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실 계획‘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장엄한 구원 계획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신실하게 수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다시 오셔서 새하늘 새땅을 주신다는 약속도 이루심을 믿습니다. 약속을 이루시는 주님을 믿고 오늘도 소망가운데 살게 해 주세요.
_20250310 ▪️본문 : 창세기48-50장 (3주/ _20250310

▪️본문 : 창세기48-50장 (3주/1일차)
▪️제목 : ”나는 나그네인가 정착민인가?“

1. 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어제 마라톤에 참여한 한 자매의 고백이 마음에 울림을 주었습니다. 자매는 인생도 달려갈 길이 있고 마지막 피니쉬가 있는 마라톤과 같다고 했다고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다 달린 후에 주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있을 것이라며 청년부에서 마라톤 경험을 나눴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후 제게 코스를 다 뛴 후에 얻은 메달을 보여주며 밝게 웃은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도 인생을 ’나그네 길‘로 묘사합니다. 그 말은 이생이 ’본향‘을 찾아가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가는 나그네이고,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달려가는 마라톤 경주자인 것입니다. 

2. 나그네 길을 험악한 세월로 만들어선 안됩니다. 
인생을 나그네로 생각하지 않고 영원히 있을 곳이라 착각하여 이곳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며 정착민처럼 집착하게 되면 고단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는 지나친 집착으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며 평생을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꾀로 행복을 얻으려 결국 아버지와 형울 속이며 도망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후 자기보다 더 속임수에 능한 외삼촌을 만나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속아 요셉을 잃은줄 알고 13년동안 슬퍼하며 세월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는 바로 왕 앞에가서 이야기 합니다. ”저의 130년 나그네 인생은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3. 하나님은 험악한 세월을 바꾸실 수 있는 분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잘못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지 않고 방황한 자신의 삶을 후회하여 ’험악한 세월‘이라고 고백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고난이 많았지만 하나님이 약속대로 함께 하셨고 그의 삶을 은혜롭게 빚어가셨습니다. 그는 실수 투성이의 인생이었지만 하나님은 빛나는 인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셨고 야곱의 아들들을 통해 그의 나라를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계획을 이루시는 변함없이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우리의 삶이 본향 찾아가는 나그네 인생임을 잊지 말게 해 주세요. 그래서 이땅에 욕심 때문에 집착하며 방황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내 삶을 온전히 이끄시고 있는 주님을 신뢰하며 기다림과 내려놓음의 삶이 되게 해 주세요“.
_20250307
▪️본문 : 창세기 37-40장 
▪️제목 : 고난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계획

1.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항상 평탄한 삶을 보장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자이기 때문에 이해 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요16:33) 신자들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똑같이 어려움을 당할 수 있지만 차이점도 있습니다. 그 고난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셉의 삶이 그랬습니다. 형들의 미움으로, 여인의 악의적인 무고로, 상관의 오해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2. 그 모든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요셉의 삶처럼 우리의 삶에도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사용하여 그의 선한 계획을 이뤄 가십니다. 요셉은 오랜 시간 고난 가운데 있었지만 그의 결과를 우리는 잘 알고 있듯이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과 주변 국가의 국민들을 살려내는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한 가정의 총무로 행정의 일을 배우게 하셨고, 감옥의 간수장을 도와 정치도 곁에서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은 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가운데 있습니다. 

3. 고난을 통해 신자는 더 성숙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힘들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숙을 위해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있지만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1:2-4) ”하나님! 우리의 삶에도 요셉과 같은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거절도 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써서 오해도 받고, 시험과 유혹도 받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선하게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믿고 더욱 성숙해 지는 우리가 되게 해 주세요“
_20250306
▪️ 본문 : 창세기 32-36장 
▪️제목 : 하나님과의 첫 만남을 회복하고 싶다면…..

1. 벧엘은 어떤 곳인가? 
신자들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경험은 저마다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각자의 하나님을 경험한 신앙 간증들을 들으면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맞게 다양한 방법으로 만나 주셨구나 알게 됩니다. 그때마다 서로를 만나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쌍둥이 야곱은 소위 말하는 모태 신앙인이었습니다. 주로 어머니 리브가 밑에서 신앙교육을 받으며 신앙생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깊이 만난 곳은 청년때에 가족을 떠나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도망 가던 때였습니다. 그때 벧엘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신비한 체험을 하면 하나님을 비로소 만났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으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2. 벧엘을 잃어버린 사람들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늘 충만 할 수 없습니다. 죄와 연약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멀어질 수 있고, 메마르고 식어지는 신앙으로 침체되어 무미건조하게 형식적인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감흥이 없고, 찬양을 해도 무성의 해 질 수 있으며, 기도에도 열의가 없어지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요?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헛된 욕망이 신앙생활에 집중케 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관계에서의 어려움과, 시험과 유혹에서 넘어짐과, 고난과 고통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진 채로 즐거움과 기쁨없이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왜 벧엘을 찾아야 하는가? 
우리의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야곱의 벧엘이 하나님과의 만남, 첫사랑의 예배,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된 곳이었기에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 사모하며 외쳤던 것처럼, 우리도 '나의 벧엘'을 찾아야 합니다. 야곱은 자녀들의 일로 큰 곤경에 빠졌을 때, 낙심이 되고 침체가 되었을 때 '벧엘'을 사모하며 하나님이 도우심을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때라면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제 내 안에 있는 헛된 욕망 내려 놓습니다. 잘못을 철저히 회개합니다. 변명하거나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처음 주님을 만난 때로 순전히 돌아갑니다. 모든 잘못을 받아주신 주님의 품으로 나아갑니다. 벧엘의 주님! 제게 정결한 마음 주시고 정직한 영을 회복시켜 주세요. 예배의 감격과 기쁨을 주시고 죄를 멀리하게 해 주세요. 나의 첫 벧엘에서 만나 주신 주님 다시 저를 만나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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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20250226

▪️본문 : 사무엘하 11:1,2절
▪️제목 : 영적 긴장을 늦출 때가 적신호

다윗은 하눈을 위로하려고 했고 암몬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눈과 그의 신하들은 다윗을 의심했고 사절단을 모욕적으로 대하여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진심과 의도를 잘못 해석할 때 큰 갈등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눈의 행동은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된 모욕이었지만 그로 인해 큰 전쟁과 고통이 시작 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업수이 여긴 암몸과 큰 전쟁을 일으킵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웠지만 암몬은 세상의 무기와 군사적 숫자를 의지하여 싸웠다는 것입니다. 암몬은 아람군과 연합을 이뤄 처음에는 압도하는 듯 보였지만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우는 다윗의 군대에 크게 패하게 됩니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12절)

본문에서는 아람 군이 다윗에게 패배한 후, 아람 왕들이 다시는 암몬을 돕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셔서 승리를 주심으로 그들의 적은 더 이상 대적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패색이 짙은 전투에서 역전하여 승리한 후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승리를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는 승리에 도취하여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큰 싸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이때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밧세바 간음 사건‘이었습니다.(11장) 다윗은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여 큰 싸움을 이긴 후 마음이 느슨해 졌고 그 사이를 악한 영이 비집고 들어와 그의 공허한 마음을 잘못된 욕정으로 채웠던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영들은 신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정면으로 공격해 보기도 하고 측면으로 회유해 보기도 하고 후면에서 사탕발림으로 찾아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 근신하며 기도하지 않으면 아주 자그마한 싸움에서 넘어질 수 있기에 기도해야 합니다.
_20250225

▪️본문 : 사무엘하 10:1,2
▪️제목 : 오해로 인해 빚어진 갈등 

삶은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합니다. 인간 관계에서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기도 하는데, 상대방에게 조그만한 은헤라도 입었다면 잊지 않고 보은하고자 하는 마음은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과거에 자신에게 도움과 은혜를 베풀었던 암몬 왕 나하스를 기억했습니다. 훗날 나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이 왕이 되자 조문 사절을 보내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 했습니다.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2절) 다윗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눈의 신하들이 다윗의 선의를 의심했습니다. “다윗이 조객을 당신에게 보낸 것이 왕의 아버지를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나이까”(3절) 그들은 다윗의 선의를 곡해하고 의심하여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시킵니다. 결국 사절단의 수염을 깎고 옷을 찢어 부끄러운 부분이 노출되게 하는 치욕을 무례하게 행합니다(4절) 신하들은 하눈을 가스라이팅 하여 다윗의 진심어린 호의를 곡해하고 의심케 하여 그들의 관계를 악화 시킨 것입니다. 

다윗은 선한 뜻으로 친절하게 은혜를 베풀고 싶었지만 불필요한 의심과 오해로 그 호의는 거절 당했습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귄위의 상징인 수염이 강제적으로 깎이고 중동볼기까지 옷을 찢는 다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모욕적인 행위였습니다. 주변 신하들의 왜곡되고 삐뚤어진 조언으로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눈은 관리들의 의심가득한 왜곡된 조언을 듣고 잘못 결정함으로 결국 온 나라가 큰 곤경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하눈은 주변 신하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윗의 심중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조문 사절단의 저의가 의심이 되었을지라도 모욕적인 행위 만큼은 삼가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삶에서 상대방에게 선한 뜻으로 친절과 호의를 베풀지만 비뚤어진 의심과 경계심으로 오해를 받아 불필요한 갈등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친 행동을 하며 안 좋은 의도로 접근할 때 모든 상황을 면밀히 보며 경계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상대방의 선한 의도를 믿고, 지혜롭고 열린 마음도 가져야 합니다. 또 주변인의 잘못된 조언에 휘둘려서도 안되고 남들에게 무례하게 행해서도 안됩니다. 오늘 아침 은혜를 잊지않고 베푸는 삶, 상대의 친절을 곡해하고 의심하지 않는 열린 마음, 선을 행하다가 거절을 당할 지라도 낙심하지 않는 삶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아침이 되길 바랍니다.
_20250224 ▪️본문 : 사무엘하 9:7절 ▪ _20250224

▪️본문 : 사무엘하 9:7절 
▪️제목 : 인생 역전한 우리들 

다윗은 요나단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의 남아 있는 아들들이 있는지 찾았는데 므비보셋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조가 무너진 후 외진 곳에서 숨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적 급히 도망치다가 다리를 크게 다져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삼하4:4) 다윗은 그를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지키고자 극진하게 대접했고 왕궁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살도록 초대했습니다. 절망 가운데 은신처에서 숨어 살며 지낸 므비모셋은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므비모셋은 다윗 왕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8절) 

그는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 왕가의 후손으로 다윗 왕 앞에 설 면목도, 자격도 없음을 알았기에 왕의 호의와 친절이 특별히 고맙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대게 왕의 정적들의 후손은 철저히 제거해서 훗날 복수의 씨앗이 없게 만드는 것이 관례였기에 므비보셋은 은신처에 숨어 살았던 것인데, 자신을 찾아 도리어 왕자 처럼 대우해 주는 것이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왕자의 한사람으로 대우하며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멀을지니라“(7절) 므비보셋은 왕의 은혜로 존귀함을 얻으며 살 수 있었습니다. 

다윗과 므비보셋의 이야기는 오늘의 신자들에게도 은혜가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은혜는 ’받을 가치가 없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을 자격도 없이 연약한 죄인들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영원한 잔치 자리에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후손으로 므비보셋은 자신을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여겼는데 거저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과도 같은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은 개와도 같은 존재가 왕의 아들의 신분‘으로 변화가 된 것은 전적인 은혜 였습니다. 

어쩌면 아담의 후손인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왕자의 신분이 되어 주님의 집에 살며 그의 식탁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과 맺은 언약으로 아들 신분을 얻는 주의 자녀들입니다. 자격이 없는 연약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존귀한 자녀로 대해 주십니다. 우리는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서 이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구속 언약‘으로 말미암아 왕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존귀에 처한 우리들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당당히 세상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아침이 되시기 바랍니다.
_20250214 본문 : 사무엘하 7:1,2 제목 : 하 _20250214
본문 : 사무엘하 7:1,2
제목 : 하나님이 주어가 되는 삶을 살자 

다윗이 법궤를 가지고 궁으로 들어온 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습니다. 통일 왕국의 왕이 된 다윗의 시대는 태평성대였습니다. 주변의 모든 적국도 함부로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샬롬을 찾은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1절) '평안히 살다'의 표현이 다윗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요? 그는 어렸을때부터 목동 생활을 해서 집이 아닌 들에 있었고, 20대 대부분은 광야와 굴에서 생활 했었는데 이제 드디어 집에서 평안히 살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찾은 평안한 삶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여호와께서…..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주어가 다윗이 아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거친 광야에 두셔서 훈련하시고 연단도 하셨지만, 그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셔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형통케도 하시고 곤고케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햇빛도 주시고 비도 내리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맞은 다윗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2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생하다가 낙이 오면 자기 자신에 집중하며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까 생각하게 되어 있는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더욱 생각하며 천막을 헐고 근사한 성전을 짓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자신은 화려한 집에 사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쾌쾌한 냄새가 나는 천막안에 있음이 마음에 불편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왕상8:18) 하나님도 다윗의 마음을 기특하게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자신보다도 하나님의 집을 생각하는 것을 대견해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우리도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때때로 광야에 두시기도 하고 평안히 거하게 하십니다. 때때로 푸른 초장에 또 눈물의 골짜기에 두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광야에서도 주님을 찾고 넓은 집에서도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혹 여러분이 아직 광야를 지나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평안히 쉼과 회복을 주실 것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_20250213 ▪️본문 : 사무엘하 6:16절 ▪ _20250213

▪️본문 : 사무엘하 6:16절
▪️제목 : 다윗은 진짜 벌거벗고 춤을 추었을까?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법궤가 다윗 궁으로 들어옵니다. 성경은 이때 다윗이 기뻐 뛰며 춤을 추었다고 기록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다윗이 너무 기쁜 나머지 벌거벗고 춤을 추었다고 덧붙였는데 그 이유는 다윗의 아내 미갈의 지적 때문입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20절) 그럼 미갈은 왜 다윗을 업신여기듯 거칠게 이야기 했을까요? 그리고 정말 다윗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춤을 추었을까요? 그 해석은 아래처럼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미갈은 다윗이 춤을 추는 자체를 못 마땅해 했습니다. 당시 성경을 포함한 고대 근동의 기록들을 보면 춤은 보통 남자들이 아닌 젊은 여자들, 종들이 추었던 것으로 보아 고대의 문화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남자 그것도 왕이 춤을 춘 것을 미갈은 싫어한 것입니다. 둘째로, 다윗이 나체로 춤을 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몸을 드러내다‘의 ’니글라‘, 히브리어 표현은 ’벌거벗었다‘가 아니라 ’자신을 나타내다‘의 표현에 더 가깝습니다. 즉 나체가 된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맨살이 드러났을지도 모르지만 회중들 앞에서 왕이 종처럼 체신없이 춤을 춘 것을 미갈이 문제 삼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갈은 왜 이렇게 다윗을 무시하며 경망스럽다고 질책하고 있을까요? 미갈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녀의 문제는 영적인 기쁨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미갈을 표현할 때 ”사울의 딸“이라고 의도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법궤의 중요성을 알지 못해 교감하지 못하고 야단법석 떠는 다윗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볼 때 왕은 체통을 지키며 근엄 하게 있어야지 저잣거리의 건달들 처럼 경망스러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나를 택하사 나를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21,22절) 다윗은 자신 같은 천한자를 사랑하셔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그의 종이 되어 찬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에배자의 모습입니다.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면 뻣뻣하게 팔짱끼고 교만한 모습으로 있을 수 없고 감격과 기쁨으로 겸손히 찬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갈이 아닌 다윗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내 삶으로 들어올 때 기뻐 뛰며 찬양하는 겸손한 우리가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아침이 되시길 바랍니다.
_20250212 ▪️본문 : 사무엘하6:13-15절 _20250212

▪️본문 : 사무엘하6:13-15절 
▪️제목 :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삶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법궤를 메고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수 있었고, 법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기도 했기에 법궤는 나라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법궤를 오랫동안 방치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웃사 사건 후 법궤를 왕궁으로 옮겨 오는데 신중을 기합니다. 다윗은 편의가 아닌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제사장들의 어깨에 메게 하여 운반을 합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명령합니다. ”다윗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부르고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몸을 성결하게 하고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르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대상15:11-13) 다윗은 말씀이 가르치고자 하는 방식을 철저히 따르고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아니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대합니다. 

다윗은 말씀 순종의 결과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제자장들이 법궤를 메고 여섯걸음만 가게 합니다. ”법궤를 그의 성으로 운반하면서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13,14절) 다윗은 여섯걸음으로 신중하게 실험을 해 본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순종할 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기쁜 나머지 예배한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너무 기뻐서 춤을 추면서 유명한 시로 다음과 같이 노래 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사24:7,8) 문들이 ’머리를 든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문 안으로 들어가시도록 ’활짝 열린다‘의 의미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었지만 영원한 왕은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마치 파수군처럼 ’왕이 들어가신다‘ 선포하며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첫째로, 우리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것과 둘째로, 마음의 문들이 활짝 열려서 영원한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실 수 있도록 고백하는 신앙이 되도록 적용하면서 기도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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