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나중된 자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

November 4, 2017

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20:1-16절)

 

 

비유의 문맥

 

성경을 볼 때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문맥입니다. 어느 강설, 비유, 사건이 어떤 문맥과 정황에서 비롯되었느냐가 그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거의 결정적일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앞뒤 정황과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복음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포도원 품꾼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상황에서 이 비유가 나왔는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부분 “먼저 된자가 나중되고 나중된자가 먼저된다”는 말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는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비유가 나오게 된 정황과 문맥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어떤 정황에서 예수님이 말씀 하신 것일까요? 그 앞의 두사건 때문입니다. 우선은 어린 아이을 용납하시고 안수한 사건(마19:13-15절)과 부자 청년의 질문 사건(마19:16-22절)입니다. 이 사건 뒤에 ‘낙타와 바늘구멍 비유”가 나오고 제자들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쫓았는데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요구가 있을 때 ‘먼저 된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정리를 하신 뒤, ‘포도원 품꾼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의 두 사건을 의미심장하게 먼저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부자 청년 사건.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꾸짖고 나무라는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야단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십니다. “천국은 이런자들의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린아이의 어떤 특징이 천국의 자격을 부여한 것일까요? 어린아이의 죄성, 무지, 좌충우돌, 심지어는 순수함(?) 이런 것들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강조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합당한 어린아이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의 연약과 부족을 알고 전적으로 부모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의 의를 주장하지 않고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학력, 재산, 봉사의 경력, 쌓아놓은 명예 등 이런 것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저 부모의 그늘 밑에서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고마워 하며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반면에 부자청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부자청년은 자기의 의에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왔으므로 자기의 의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연약하고 죄로 인해 은혜가 필요한 사람임에 불과했지만, 어렸을때부터 청년에 이르기까지 자기생각으로는 율법을 거의 완벽하게 지킨 것 같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했으므로 구원에 있어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자기의 의’를 의지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청년에대해 조금만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자 청년은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꽤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청년으로 부자요 또한관원이었습니다. 관원은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으로 꽤 출세한 사람이었습니다.(눅18:8) 소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학력, 재산, 지위도 다 갖춘 상위 1%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젊은 시절의 성공으로 무례하고 무절제한 사람일 수 있었는데, 그는 도리어 겸손하고 도덕적인 인 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존경하며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온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모든 것을 지켰다고 할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구제도 많이 하고 있었고, 신앙적인 절제도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구원과 삶에 관련해 진지했던 그를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막10:21)  그렇다면 부자 청년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선을 통해, 자기의 의를 통해 영생을 얻고자 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선하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라고 반문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질문은 “어떻게 더 선해야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였습니다. 즉, 그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에 걸맞게 대답도 구원의 방법을 율법으로 대답하신 것입니다. 즉, “네가 영생을 얻고자 하면 율법, 계명을 지켜라”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으로 구원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부자 청년은 율법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의 의가 되어 실상 거들먹 거리며 자기가 해 온일을 자랑하고 칭찬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렸을때부터 지켰습니다”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놀랄만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 (눅18:22) 예수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정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이단과 사이비들이 말하는 것처럼 재물을 다 교회에 헌금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삭개오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준다고 했을 때 칭찬하시지 않았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재물 다 팔고 빈털터리 거지가 되라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즉, 율법으로 계명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면 완벽하게 지켜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이웃을 사랑하되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부자 청년은 자신이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면 재물을 다 팔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대다수의 모든 사람들이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창피와 모욕을 주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자청년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부자청년은 자기가 해온 모든 것을 통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자체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청년은 깨닫지 못하고,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겠기에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고 돌아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자신은 최고 점수를 받아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천국의 행렬에 맨 먼저 서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맨 마지막에 서 있는 이탈자요, 낙오자였던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그런 후에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시면서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자가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저정도로 칭찬 받고 인정 받는 사람이 못들어간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부자청년이 빠졌던 함정에 빠져 자신의 의를 붙들고 있는 듯한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떤 보상을 받게 될까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천국에서 하나님이 공평하게 다루심으로 진정한 신자들에게 임할 보상을 말씀하시긴 했지만, 그런 율법주의와 보상주의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가르쳐 주고자 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명한 “포도원 품꾼 비유”가 나온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

 

1. 구원 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 일군을 부르신 목적은 포도원으로 들여보내기 위함 : 예수님은 포도원 품꾼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20:1) 이 구절에서 천국은 집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천국을 이해하는 것은 집주인을 아는 것입니다. 집주인의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도요한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 천국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그 집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일방적으로 품꾼들을 사랑하시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내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을 유의하여 보면 주인은 일꾼들에게 일을 시키려고 품꾼들을 고용하였다기보다는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일꾼들을 찾고 있습니다. 일군들에게 일을 시키기만 위한 목적이었다면  아침 6시에 불렀으면 그만이지 굳이 9시, 12시, 3시, 5시에 그들을 부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포도원에 들여 보내기 위한 목적이 더 강했던 것입니다. 본문에는 ‘포도원에 들여보낸다’는 주인의 목적이 4번이나 나옵니다.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포도원에 들어가라,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1, 2, 4, 7,절) 이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적절한 예가 생각이 났습니다. 바로 독일 홀로코스트 학살시절 많은유대인들의 목숨을 구원한 오스카 쉰들러입니다. 쉰들러는 사업가로서 독일인에 의해 학살되는 유대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의 전 재산을 팔아 유대인들을 자신의 공장에 고용해서 1,100명의 유대인들을 구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쉰들러는 유대인들을 고용해 이익을 산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 유대인들을 공장으로 한명씩 불렀던 것입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제게는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독일의 패전으로 사업가인 자신도 전범으로 몰려 도망갈 때 유대인들이 그를 위해 탄원서를 써주고 도열해 그에게 반지를 선물해 준 장면이었습니다. 반지에는 유대인들의 감사표시로 “한사람을 구원한 것이 세상을 구원한 것입니다”라는 글귀도 적어 넣었습니다. 그때 쉰들러는 오열을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더 많이 수고 해서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었는데….이 자동차도 팔면 10명을 더 구출해 낼 수 있었는데, 금뱃지를 팔면 두명 더 살릴 수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모두가 다 그를 부둥켜 안으며 “이미 당신은 우리를 위해 많은 것을 했습니다”고 감사했는데, 쉰들러는 못내 아쉬워하며 울먹거렸던 모습입니다. 쉰들러는 유대인들을 자신의 공장으로 취직시켜 1천백명의 사람들을 구출해 내었습니다. 그 어떤 유대인도 일찍 고용이 되어 일했다고 나중에 온 유대인들을 괄시하거나 불평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가스실에 끌려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자신들을 구출해 준 쉰들러가 고맙고, 나중에 온 유대인들이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대가를 지불하시며 우리들을 구원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런 집주인의 고마운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주인의 마음을 알고 감격하며 고마워하며 그 주인의 사랑을 즐기는 것입니다. 

 

2) 포도원 일군들로 부르신 그들은 하나같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음:  포도원 주인이 불렀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놀고 섰던’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를 품꾼으로 써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다”라고 말합니다. 일당용역을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인력시장에서는 일반적으로는 기술이 있고, 능력이 있는 인력들은 일찍 팔려 나갑니다. 별로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은 하루를 공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포도원 비유에서도 부름받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가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인은 그런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바울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1:26) 실제 제자들도 모두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의 공로를 주장할 입장이 아닙니다. 모두 다 나중에 온 사람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면 모두 ‘놀고 섰을’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좇았다”고 그의 공로를 주장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베드로는 그럴 만한 주장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3년동안 사랑받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행위에 근거해 공평한 처분을 요청할 입장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저 구원해 주시는 것도, 일군으로 써 주시는 것도 감사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나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많은 시간 봉사를 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넘어지고 쓰러지는 좌충우돌하는 연약한 사람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를 용서하시는, 관대하게 대하시는 주님께 감사할 따름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우리의 행위로 대하시지 않고 자비로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냥 낙제점인 우리를 부르셔서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것에 감사해야 할 따름입니다.

 

 

2. 모든 성도들은 나중온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1) 많은 일을 했다고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 

그럼 과연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이른 먼저와서 수고한 사람들, 불평했던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을까요? 그렇지 못했을까요? 본문을 유추해 보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 근거는 두가지 입니다. 우선 비유된 부자청년이 구원 받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재물로 인해 근심으로 돌아갔고, 예수님이 그에 대한 평가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한 것과, 제자들이 “저런 사람도 구원 받지 못하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연관 구절 눅13:24-30을 보면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는 말을 똑같이 언급하면서 먼저온 자들은 못 들어가고 “슬피 울며 이를 간다”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은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소위 잘난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을 때 그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좇고, 능력도 행하고 그랬습니다”. 그때 주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마7:21-23)

 

2)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마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마음이다 : 나중에 5시에 부름 받은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일을 했을까요? 그들의 마음은 다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를 부르신 주인을 위해 한시간이라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자. 다른 사람이 한 것의 몇배로 일을 해야 주인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한시간 남겨놓고 우리를 부르신 주님께 보답하는 길이다” 그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그저 써 주시는 것에 감사하면서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주님에게 합당한 마음인 것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저 은혜에 고마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십자가상의 강도의 마음입니다. 십자가상의 구원 받은 강도는 죽기 전에 부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휴 다행이다. 죽기전에 막차 탔네.”그런 마음이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은 강도를 부러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생 놀고 먹다가 죽기전에 요행으로 믿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강도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강도가 살고 싶어했던 내일이었을 것입니다. 강도에게 한달만 주어졌다면, 아니 하루만 주어졌다면 하나님을 위해 사랑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늘 5시에 부르심을 받은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바울이 그런 마음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정말 많은 수고를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늘 자기를 부르심에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감사한데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시고 수고하게 하신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3. 은혜를 잊을 때 불평과 원망이 생기게 됩니다. 

 

1) 문제는 임금 나눌 때 발생했다 :  먼저 온 사람들은 만약 주인이 자기들부터 데나리온을 주었다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한데나리온 주니까 자기들은 몇배를 더 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사람들과 비교하게 되면서 은혜를 잊게 되었고 불평과 원망이 생겼던 것입니다. 왜 나를 저 사람들과 똑같이 대우하느냐는 불만이었습니다. 가끔 율법주의 공로주의, 자기의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길 좋아하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되지 않고 자기의 자랑만 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은혜를 잊으면 남는 것은 불평과 원망밖에 없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니까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출애굽의 은혜, 홍해를 건넌 은혜, 마라의 쓴물을 바꿔주신 은혜 등 은혜를 잊으니까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은혜가 사라지고 원망 불평이 남게 되면 우리가 심각하게 병들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적용 : ‘먼저 온 자가 나중되고 나중 온자가 먼저 된다’는 말은 세상사람들에게도 많이 통용되는 문구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정확한 해석은 구원 받기에 합당한 사람의 마음은 나중온 자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나중 온 사람의 마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는 연약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많으면 그것이 바로 부자 청년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뤘다고 할지라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우리들에게 은혜 주셔서 지혜 주시고, 학업하게 하시고, 일터 주시고, 가정 주시고, 삶을 주신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남보다 많이 일했다고 자긍심을 갖고 남을 무시하며, 남을 업수이 여기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이 수고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며 주인을 의지하는 것이 복음을 경험한 사람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이 그런 마음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다가 하나님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기에 우리가 보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아무리 거절을 해도 적절하신 보상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 잊었는데 하나님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의인에게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우리를 칭찬하시고 우리가 행한일에 풍성한 보상을 주실 것입니다. 나중온 사람들의 마음처럼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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